최숙희
최숙희
CHOI SUK HEE
MISSIONARY WORK 선교 활동내용
최숙희 교수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충성됨을 지키기 위해서 카자흐스탄으로 떠나게 되었다. 2년 반 동안 카자흐스탄에서 교수로 섬기다가 2002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더 방향성 있는 선교를 위해서 GBT에서 성경 번역 교수로 헌신하게 되었다. 최숙희 교수는 그 후 아프가니스탄 ‘카블’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GBT 선교회는 아프가니스탄 국내에 NGO를 두지 않고 있었다. 이 지역의 사역자들은 주로 NGO를 통해 체류비자를 받고 있는데 최숙희 교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은 현지에 세워진 NGO의 일원으로 등록해 비자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장 중심의 사역팀이라는 개념이 대두된다. 즉, 파송단체는 다르지만 현장의 필요에 민감하게 대처하기 위해 현장의 사역자들이 새로운 팀을 이루어 일을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사역자들이 입을 모았던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변화속도는 예측할 수 없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비자 정책이 어떻게 변화할 지 모르고, NGO의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압박을 가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그 곳의 필요에 민감한 자세로 대처하는 유연함이 절실히 요청된다. 신경 쓸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음은 최숙희 교수가 사역 가운데 현지 사람들과 겪었던 어려움을 쓴 글이다.

〈강의하고 있는 사범대학 3학년 학생들과 중간시험에서 부정행위를 과도하게 단속하는 과정에서 서로 맘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전쟁상황을 견디어 온 우리에게 가장 큰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정직의 강요는 너무 무리한 요구이다. 이곳의 상황에 무감각한 선생에게서 배울 용의가 없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에 섭섭함이 컸습니다. 그리고 실패감과 내가 너무 이 문화와 상황에 둔감한 채 내가 생각하기에 우월하다고 하는 가치를 고집해왔다는 자괴감이 뒤를 이었습니다. 학과장이 개입해서 문제를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신뢰가 깨어진 상태에서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학기 중간에 강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사흘을 심하게 앓아 누웠습니다. 앓아 누워 있으면서도 좀처럼 섭섭함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만드신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로만 어렴풋이 깨달았던 ‘생각’을 가슴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 의의 기준을 고집하며 판단하는 자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결과 감옥에서 지내야 했던 비유를 떠올렸습니다. 그 감옥은 바로 자신을 얽매는 부자유함이었고 내 방식을 고집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앙심을 품고 용서하지 못하는 제가 바로 그 빚진 자였습니다. 〉

최숙희 교수는 이렇듯 바쁜 일과 우선순위의 문제, 문화적인 차이로 고생을 하고 2년 후, 카불을 떠나 더 열악한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과 전쟁 중이어서 황폐한 땅이었던 그 곳은, 부시 대통령 때 몇 미터 간격으로 융단 폭탄을 깐 땅이라서 화학물질로 오염이 되어,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고, 물이 오염되어 마실 물이 없는 땅이었다. 다음은 최숙희 교수가 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며 쓴 글이다.

〈갑자기 밀어닥친 추위로 탱크와 관이 얼어 20일 가량 물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설거지와 빨래, 세수, 그리고 화장실 등 반드시 필요한 물을 매일 물병(1.5리터 들이)에 길어다 썼습니다. 낭비없이 소용되는 물의 양은 다음과 같은데 머리 감는데 세 병, 세수에 한 병 반, 그리고 설거지는 두 병 반이 듭니다. 설거지 할 때, 합성세제를 쓰면 많이 헹구어야 하기 때문에 물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는 쌀뜨물을 모았다가 세제로 쓰면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흐르는 물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실제로 사용되는 물보다 무심코 흘러나가는 물의 양이 서너 배나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없이 써서 낭비한 전기나 물, 그리고 에너지 사용에 관한 새로운 자각이 이 땅의 첫 겨울을 지내면서 얻은 귀한 배움입니다.〉

많은 아프가니스탄 선교사들이 화학 물질로 인해 땅이 오염돼서 암으로 투병하는데, 2007년 1월에 허리통증에 의해 한국으로 귀국한 최숙희 교수도 그 중 한 명으로 진단받게 되었다. 최숙희 교수가 걸린 암은 육종암으로, 보통 쓰는 항암제의 10배 정도를 더 써야하는 암이다. 2007년 2월 첫 수술 후에 2년간 항암치료 및 투병을 하다가 2008년 11월 20일 응급상황으로 포항 선린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다음 날인 2008년 11월 21일에 샘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계속 투병하다가 결국 2008년 12월 22일에 소천하였다.
AFTER MARTYRDOM 한동대학교에서의 활동내용
교수 생활 중 노조로부터 주민들의 반대가 있어 학교가 많이 어려워 월급도 제때 못 받았지만, 그나마 받은 월급까지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로 주고 기도함으로 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숙희 교수는 한동대학교에서 보낸 4년이 가장 복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ADD A BIT 첨언
성경 번역 교수로 헌신했지만 시작하자마자 병으로 한국으로 나와서 투병 생활 후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최숙희 교수는, 뚜렷한 업적이나 눈에 보이는 열매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충성한 최숙희 교수의 믿음은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최숙희 교수의 성품 중에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충성됨이다. 약속을 꼭 지키고, 마음이 청결하고 간사함이 없었다. 또, 명예나 돈에 대해서는 자유함을 가지고 있었다. 최숙희 교수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라는 찬양의 내용과 같이, 평생 예수님과 동행하며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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