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 You
나의 가장 약함을 아시는 주님.
작성자: 이유림   |   작성일: 2018.03.09   |   조회: 1954

저는 저의 연약함 때문에 한동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사실 한동에는 수많은 간증과 놀라운 사연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한동 대학교의 학생 한 명 한 명, 모두 다 각자의 소명을 따라 부르셨을 줄 압니다. 저는 이 나눔 간증을 준비하면서 지난 열아홉 해 동안 하나님이 빈 오선보와 같은 제 삶에, 음자리표를 그리시고 박자표와 음표, 쉼표 등을 넣어 가시는 손길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저의 연약함을 다루시기 위해 이곳 남송리 3번지 한동대로 부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삶에 대하여 나누기 위해서, 먼저 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1남 2녀 중 맏딸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들을 기쁘게 라는 가훈을 따라 저희 삼남매의 이름을 각각 유림(愉臨)-기쁨을 임하게 하라, 유빈(愉份)-기쁨을 빛내어라, 유상(愉常)-항상 기뻐하라는 뜻으로 지으셨습니다. 사실 저희 집에는 조금은 특별한 보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산이나 보석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제 두 동생들입니다. 이 아이들로 인해서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저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3대째 목사 가정인, 말 그대로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자라오셨습니다. 그에 반해 어머니께서는 불신 집안에서 자라 오셨습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두 분이 만난 지 1년 후, 첫딸인 제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양가 친척들은 저희 가정을 축복해주었고, 저는 첫 손녀, 첫 딸로서의 사랑을 맘껏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제 돌이 조금 지났을 때, 연년생 여동생인 유빈이가 태어났습니다. 동생은 매우 작았고, 이상할 정도로 몸이 약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이 잘 내리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몇 달이 지나도 목조차 가누지 못했습니다. 당시 동생은 24시간 내내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 마침 아버지께서는 신학을 공부하는 가난한 전도사님이셨기 때문에, 중학교 교사이시던 어머니는 휴직을 하고 동생 곁에만 붙어있으셔야 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그렇게 그저 이 아이가 몸이 좀 약하거니 하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동생의 증상이 나아지지 않자, 어머니께서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시고 동생을 서울의 큰 병원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얼마 후 정밀 검사의 결과가 나왔고, 제 작은 여동생은 ‘뇌성마비 1급 장애’라는 판명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저희 가족의 생활은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저는 전주의 외가댁에 맡겨져 부모님과 동생과 따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 당시 포대기로 앞에는 유빈이를, 뒤에는 저를 업고 아버지 뒷바라지와 동생의 병원치료를 위해 먼 거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셔야 할 정도로 고된 육아를 담당하셔야 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신대원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다시 서울로 오셔서 어머니와 교대로 유빈이를 돌보셔야 했기에 주말이 되면 두 분 모두 녹초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다지 길지는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당시 어린 아기였던 저는 엄마 품에서 맘껏 놀지 못해서인지, 몇 달 동안이었지만 말을 더듬는 가벼운 언어 장애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폭풍과도 같던 몇 년이 지나가자 어머니는 다시 복직을 하셨고, 아버지는 교회에서 목사님으로 섬기시며 장애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휠체어를 타는 동생 덕에, 또 아버지의 장애인 사역 덕에 어려서부터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이 시간은 저로 하여금 장애인들과 같이 사회에서 관심 받지 못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게끔 해준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크면서 철없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수군거림에 때론 상처를 받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설 때 때때로 제게 당혹감을 안겨주기도 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저를 속상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어린 시절에 제게 정말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제게 이러한 어두운 생각과 마음을 금방 잊고 밝게 생각할 수 있는 성격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이렇듯 맘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있었지만, 저는 곧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말도 어눌하게 하는 제 동생을 도리어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동생의 휠체어를 밀고 사람들이 많은 백화점이나 길거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쏘다니는 등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초6이 될 때까지, 저희 가족은 다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주셨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2005년 12월이었고, 저는 독수리기독중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에 입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임신 중이셨는데, 이미 지난 몇 년간 여러 번 유산을 하신 터라 온 가족이 이 늦둥이 아이에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께서 산부인과에 다녀오시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저희 두 자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믿겨지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림, 유빈아. 네 엄마 뱃속의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란다.” 저는 정말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이 죽도록 미웠습니다. 왜 우리 가족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 명이면 족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지나갈 때, 아버지께서 사실은 그간 몇 번이나 이 아기를 지우려고 했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아이를 낳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 분명 제 마음엔 원망과 분노가 있었는데, 제 입에서는 마음과는 딴판으로 “엄마아빠, 잘하셨어요!” 라는 울음 섞인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중에 부모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께서는 그 때 무척 마음이 곤고하고 힘든 중에 계셨는데, 열네 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해주시는 칭찬과도 같이 들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공교롭게도 이듬해인 2006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저희 가정에는 또 한 명의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해 놓으셨을,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들을 하나씩 펼쳐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막내 동생이 태어난 후, 아버지께서는 당시 흥행했던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 군을 중심으로 말아톤 복지 재단이라는 장애인복지재단을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장애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직업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등의 사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의 이야기가 여러 분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여러 기독교 방송에서도 소개가 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다운증후군 아이 유상이를 통해 장애아를 임신한 가정의 부모들이 마음을 돌이켜 아이를 낳기로 한 사례가 하나 둘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첫째 동생 유빈이 또한, 교회예배와 수련회 등에서 간증도 하고 큐티책에도 글이 실리는 등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이십 년간,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모든 일들을 겪은 지금 와서 문득 깨달은 사실은, 제가 그동안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보여주시는 이러한 손길들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방관자와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현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진심으로 저와 상관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늘 동생들로 인해 힘드신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사람들이 주변에서 제 환경만을 보고 하는 인정과 칭찬의 말들을 들으며 그것이 정말 제 모습인 양 살았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동생들의 장애를 마치 저의 트로피인 양 교묘하게 치장하여 저를 더 착하고, 의롭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모습은 6년간의 기독교 학교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제 안에 있는 열등감은 깊숙이 숨긴 채, 겉을 완벽한 사람처럼 꾸미고자 했습니다. 공부면 공부, 노래면 노래, 운동이면 운동, 인간관계면 인간관계, 저는 제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가장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인정하고 칭찬했고, 저는 차츰 마음 안에 교만이라는 단단한 벽돌과 시멘트로 두꺼운 벽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정말로 깨어지게 된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건 바로 한동대 수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권유로 작년 8월부터 한동대 수시 2차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저는 제 생애 어느 때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유는, 수시를 위해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며 제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가운데, 제가 그간 잘 감추어왔던 저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하나 둘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좋은 선배로, 학생회장으로, 성실한 학생으로 인정받고 칭찬 받았던 것들이, 사실은 제 안에서 교만으로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수시를 준비했던 두어 달 동안, 저는 모의 면접 연습을 할 때 말문이 아예 막혀버리고,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쓰지 못해 계속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경험을 하면서 말 그대로 제 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믿고 의지하며 쌓아오던 제 안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돌아보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가 졸업하기 전에 주시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저는 수시준비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밑바닥까지 낮아지는 경험을 했고, 제 교만을 뉘우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저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인생에 정말 셀 수 없는 선물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장애를 가진 두 동생들과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부모님, 저를 한층 성장시켜 준 독수리학교, 그리고 저를 위해 중보기도 해주신 수많은 분들까지.......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제게 한동대학교라는 또 다른 어마어마한 선물을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저는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감사함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것들을 바탕으로, 정말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제게 새롭게 주실 4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의 한동이라는 선물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한동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임하게 하는 소명을 발견하고, 또 저 이유림을 향한 하나님의 나머지 계획과 선물들을 하나하나 풀어가기를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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